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역사속의 울릉도, 독도 상세지도 보기]

독도의 명칭
우산도(于山島)512년 →삼봉도( 三奉島)1471년 → 가지도(可支島)1794년 → 독도( 獨島)1881년

1. 연표
ll512년:(신라 지증왕 13년) 이사부 우산국 정벌 신라영토에 귀속시킴 (삼국사기)
ll930년:고려태조 13년 고려에 귀속
1401년:공도정책
1425년:우산도로 호칭
1454년:(단종2년)에 왕성된 세종실록중 권148권에서 권 155까지의 8권 8책에 지리지로써 세종실록지리지라
llllllllllllll 고도 하는데 권 153강원도 울진현조에 그 부속도서로써 우산도와 무릉도를열거하고 이들의 개략적인 lllllllllllllll위치를 우산, 무릉2도 재현 정동해중 2도 相距不遠 風月淸明卽望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사기록
llllllllllllll 은 독도와 울릉도의 관계를 뚜렷이 밝힌 세계 최초의 문헌으로 평가되며 세종 14 년(1432년)에 편찬
llllllllllllll 된 신선입도지리지를 그대로 옮긴것이라고 머리에 밝히고 있다.
1469년:삼봉도로 호칭
1693년:자산도로호칭 동래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 근해에서 왜인발견 퇴거 안용복이 은기를 거쳐 도일덕천관
lllllllllllll l 백에게 출어금지서계 요구 울릉도 일본어민 퇴각
1697년:3년마다 정기적인 치안 확보
1881년:(고종18년) 울릉도 개척령 반포 (척민정책) 일본어민의 울릉도 근해 출어에 대한 일본정부에게 엄중 llllllllllllll항의
1900년:10월 27일 (대한제국 광무4년) 관보 제 716호의 칙령 제41호 울릉도, 죽도,석도(독도)를 울릉군수가 llllllllllllll관할토록 함.
1905년:2월 22일 독도의 일본령 편입결의 도금현 고시 제40호로 독도의 동현편입 발표
1905년:독도망루설치 해군통신기지로 이용 광무 10년 3월 5일 울릉도 군수 심흥택 보고서 「매천야록」에
llllllllllllll 독도 관련기록
1907년:경상남도 울도군으로 편제
1910년:한국수산지 제1호 제1편에 한국령으로 표기
1914년:경상북도 울도군으로 편제
1946년:1월 29일 SCAPIN 제677호-연한군 최고사령관이 항복문서의 시행을 위해 일본정부에 보낸 각서 울릉
llllllllllllll 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통치권에서 제외
1948년:6월 30일 미공군 폭격연습중 독도출어중인 어민 30명 희생 한국정부의 항의에따라 1953. 2,27자 미공
llllllllllllll 군 연습기지에서 제외 1951년 6월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건립
1952년: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서 독도를 기점으로 평화선을 선포함
1953년:일본이 미국기를 게양, 조난어민 의령비 제거 일본이 미국기를 게양하고 조난어민 위령비 철거, 일본
llllllllllllll 영유 표지 설치, 한국 어민 독도근해조업에 대한 항의.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일본에 항의각서 발송 lllllllllllllll그해 8월 5일 영토비 건립, 해양경비대 파견 협의
1953년:4월 27일 울릉도 주민(33명)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대장 : 홍순칠)
1954년:항로표지(등대)설치. 동년 8월 1일 점화개시 각국에 통보
1956년:4월8일 국립경찰의 경비임무 인수결정
1956년:12월 30일 경비임무 인계인수
1966년:4월 12일 수비대장 홍순칠 공로훈장 수여
1980년:최종덕 독도 전입
1981년:헬리콥타 이착륙 시설
1986년:7월8일 최종덕의 사위 조준기(61.3.20생) 주민등록 전입 (가족 3명) 6개월간 어로작업목적
1991년:11월 17일 김성도(56세) 외 가족 (1명) 전입(서도)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 32명 근무 (동도)
1993년:레이다 기지 설치
1996년:접안시설공사 착공 독도의용수비대원 보국훈장 3.1장(대장), 광복장(대원32명)수여
1997년:울릉읍 도동에 독도박물관 건립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 Top

2. 시대적 고찰

(1)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현재 기록상 512년(신라 지증왕 13) 하슬라주(溟州) 군주(軍主) 이사부(理斯夫)의 우산국(于山國) 정벌부터라 추정되고 있다.
현재 울릉도에서 발굴·출토되고 있는 유적·유물들은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되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문화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복이후 한반도 본토 문화의 보다 활발한 유입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은 본토의 찬란했던 불교문화가 유입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으로, 울릉도·독도 등 해양도서민들과 본토민들의 활발한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2) 여진족과 왜구의 침범
고려 태조 13년(930), 후삼국의 힘에 균형이 고려로 기울어짐을 감지한 우산국은 왕건에게 래조(來朝)와 함께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고려가 새로운 통일왕조로 등장한 후 고려 중앙정부로부터 우산국(于山國) 혹은 우릉성(羽陵城)으로 불리면서, 고려의 동해안 외곽 방어선 역할을 하는 동시에 본토와 지속적인 문물교류를 통해 번성하고 있었다.
의종 11년(1157)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 김유립(金柔立)의 우릉성 조사보고에서 당시에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지만 '석불(石佛)·철종(鐵鍾)·석탑(石塔)'등이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11세기 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해 이 지역이 황폐화하기 이전까지는 본토의 수준높은 불교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산국은 대체로 고려전기 현종대 이후 급격히 황폐화 되었으며, 그 결정적인 요인은 여진족의 침입이었다.
우산국이 여진족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은 것은 현종 9년경으로 추측된다. 고려는 즉시 우산국에 농기구를 보냈으며, 다음 해(현종 10년, 1019)에는 여진족 침입 당시 본토로 피난했던 우산국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산국의 피폐상황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던 듯 하며, 이에 현종 13년(1022)에는 본토에 피난했던 우산국 사람들을 고려에 정착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고려사에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덕종 원년(1032) "우릉성주가 아들 부어잉다랑을 보내어 토물을 바쳤다(羽陵城主遣 子夫於仍多郞 來獻土物)"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우산국의 피폐가 어느 정도 복구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진족의 대규모 침입 후 본토로의 이주는 계속되었던 듯 하며, 이후 우산국의 번성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여진족의 침입이후 약 100여년이 지난 인종 19년(1141)에는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 이양실(李陽實)이, 의종 11년(1157)에는 명주도 감창사 김유립(金柔立)이 울릉도에 주민 이주와 관원설치가 가능한 지를 조사하였다.
그 후 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이후 계속된 국내외 정세의 불안과 1231년 (고종 18)부터 시작된 몽고의 침공으로 인해 옛 우산국 혹은 우릉성지역에 대한 개발은 보류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장기간에 걸친 몽고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있던 고종 30년(1243), 울릉도에 동해안 주민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당시 이주가 실시된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대몽항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육지의 주민들을 산성(山城) 혹은 해도(海島)로 이주시킨, 중앙정부의 산성·해도 입보책(山城海島入保策)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다음으로 불력(佛力)을 빌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전쟁 중 피란 수도 강화경(江華京)에서 혼신의 열정으로 판각되었던 강화경판고려대장경(江華京板高麗大藏經, 일명 八萬大藏經)의 재목(材木)을 구하기 위한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풍파로 인한 익사자가 많이 발생함으로써 이주정책은 결국 철폐되고 말았지만, 이 시기에 울릉도로 이주한 사람은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몽고와의 강화 이후 원의 대목(大木)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려정부는 울릉도에서 벌목을 행하였다. 대규모로 이루어진 벌목으로 현지민들의 고초가 심했으며, 이 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본토로 도망했으리라 생각된다.
원간섭기 동안에도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지배는 계속되었다. 고려사에는 충목왕 2년(1326) "동계의 우릉도인이 래조(來朝)하였다.(東界芋陵島人來朝)"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동계(東界)란 오늘날 강원도와 함경남도 일원으로 고려의 지방행정구역이었으며, 우릉도(芋陵島)는 울릉도의 다른 명칭이었다. 독도가 고래로 울릉도의 속도(屬島)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원의 지배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이 지역은 고려의 통치지역 중 하나였으며, 지속적인 본토와의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가 몽고의 지배를 벗어난 후에도 이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은 어려웠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충정왕 2년(1350)부터 고려말까지 계속된 왜구의 창궐이었다. 고려사에는 우왕 5년(1379) 7월 "왜가 무릉도에 보름동안 머물다가 물러갔다 (倭入武陵島 留半月而去)"라는 기록이 보인다. 현재 문헌상 우왕대의 기록만 보이지만 왜구의 이 지역에 대한 침구는 충정왕대부터 고려말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며, 주민의 거주를 어렵게 하였을 것이다.
결국 1392년 조선왕조가 창건된 후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개발은 신왕조의 과제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고려말 왜구의 침구와 이 지역의 피폐는 조선시대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통치방식으로 공도정책을 택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고려일대를 통해 울릉도·독도지역은 고려의 영토였으며,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고려시대에 작성된 자료들은 후대에 전승되어, 조선초 고려사 지리지를 편찬할 때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명기할 수 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이 지역에 대한 정책입안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3) 공도정책
조선시대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통치방식은 주민의 거주를 금지하여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空島政策)으로, 태종조부터 고종조까지 지속되었다.
한국사에서 주민의 이주정책은 흔희 찾아볼 수 있으며, 공도정책 역시 이러한 이주정책의 하나였다.
조선초기에는 여진족의 위협이 사라졌고, 고려후기 이래 집중된 왜구의 침구도 점차 수그러들고 있었으므로 동해안 외곽 방어선으로서의 울릉도의 기능은 훨씬 약화되어 있었다.
또한 태종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지방제도의 정비와, 국초부터 정력적으로 추진된 동북·서북면의 개척과 사민정책 등은 당시 국력의 집중을 요하는 것으로, 울릉도 및 독도에 대한 적극적인 경략과 재건은 보류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국초부터 추진된 조선시대 지방제도의 정비방향은 모든 고을에 수령을 파견하는 동시에 고을의 통·폐합을 통하여 그 수를 줄여가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왕조는 굳이 울릉도에 관원을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이다. 전쟁수행, 지역개발 등에 주민 이주정책을 적절히 사용해 왔던 역사적 경험은, 조선 태종조에 많은 토론을 거쳐 울릉도에 대해 '주민의 철수 및 공도화'를 택하게 했던 것이다.
한편 공도화 정책은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것과 함께 정기적인 순찰을 병행하는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부담은 계속 남는 것이었다. 때문에 섬을 비우기보다는 관원을 설치하고 주민을 이주·정착시키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논란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중앙정부의 거주제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본토의 民들은 끊임없이 울릉도와 독도에 내왕하며 어로·채취작업을 하였으며,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여 살기도 하였다. 조선왕조는 울릉도 등지에 대한 정기적인 순찰을 통해, 토산물 등의 현황을 파악하는 동시에 거주민들이 발견되는 즉시 본토로 송환시켰다.
공도정책이 시행되기 시작한 태종조 부터 대마도주의 울릉도 거주 청원이 있었으나, "이국인이 국경을 넘나들 경우 분쟁의 소지가 발생한다" 하여 번번히 기각되었다.
이러한 공도정책이 철회된 것은 1882년(고종 19)이었으며, 1883년 김옥균이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로 임명되면서 울릉도·독도 등 제 도서에 대한 본격적인 개척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4) 삼봉도

(5) 안용복 사건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의 통치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죽도(竹島·다케시마) 혹은 의죽도(磯竹島·이소다케시마)로 독도를 송도(松島)라 부르면서, 울릉도·독도 등지에서 고기를 잡거나 나무를 도벌하기 시작했다.
이에 1613년(광해 6) 조선조정에서는 대마도주에게 공문을 보내 일본인의 울릉도 등지에 대한 왕래를 금하게 하였다. 그러나 1618년(광해 10)에는 호끼슈(伯耆州) 요내꼬(米子)의 상인 오오따니(大谷), 무라까와 (村川)가문이 에도의 도꾸가와막부(江戶 德川幕府)로부터 정식 면허(竹島渡海免許)를 받는 등 일본인의 울릉도·독도에 대한 침구는 계속되었다.
한편 정부의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어부들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어장인 울릉도· 독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과 일본의 어부들은 종종 충돌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1693년(숙종 19)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을 중심으로 한 동래·울산 어부 40여명이 울릉도에서 오오따니 가문의 일본어부들과 충돌하게 되면서, 1699년(숙종 25)까지약 6년간에 걸쳐 두나라간 울릉도·독도지역의 영유권에 대해 외교문서가 오가는 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논쟁은 울릉도를 죽도(竹島-다께시마)라 칭하고 마치 별개의 섬인양 하여, 울릉도 점령의 근거를 얻어내려 한 대마도주의 계략을 사서(史書)와 안용복의 증언 등을 통하여 간파한 조선조정의 강력한 대응으로 "이후 다시는 울릉도 등지에 왕래하지 않겠다"는 일본 막부의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종결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사건의 결과로 울릉도·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일본의 서쪽 경계를 오끼섬 까지로 한계짓게 되었다.
1667년 齋藤豊仙의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 1785년 林子平의 삼국접양지도 (三國接壤地圖) 등은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일본측의 자료들이다.

(6) 조선의 지리지와 지도

(7) 칙령 41호와 군수의 파견

(8) 러일전쟁과 시마네현 고시 40호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은 러시아함대를 감시하기 위해서 울릉도와 독도에 일본 본토와 연결된 전선망을 설치하는 동시에 망루를 세웠다. 일본군부는 원활한 전쟁수행을 위해서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일본 정부에서는 1905년 1월 28일 각의결정 후, 같은 해 2월 22일 '시마네현(島根縣)고시40호' 를 통해 독도를 일방적으로 일본영토에 편입시켰다.
위 고시 40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끼도와의 거리는 서북 85리에 달하는 도서를 죽도(竹島-다께시)라 칭하고, 지금부터 본현 소속 오끼도사(隱崎島司)의 소관으로 정한다."
이 불법 편입사실은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통감정치가 확립된 후인 1906년 음력 3월 5일 에야 대한제국에 알려졌다. 이 고시는 현재 일본에 의해 독도의 편입이 '무주지선점론(無主地先占論)'에 입각하여, 국제법적으로 정당한 영토편입이라는 중요한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 고시는 당시의 독도편입이 불법적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자료가 될 뿐이다. 첫째, 독도는 당시 주인없는 땅(無主地)이 아니었다. 독도는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로 울릉도에 군수를 파견할 때, 이미 그 관할 구역(石島: 당시에 널리 불려지던 '돌섬'의 한자식 표기)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 군부가 독도에 대한 불법 영토편입을 추진하면서 표면에 내세운 일본 어업가 中井養三郞의 '리앙꼬島領土編入 貸下願'은 원래 중정양삼랑이 독도근해의 독점어업권을 대한제국으로부터 빌리기 위해서 일본정부에 도움을 요청한 것인데, 당시 농상무성 수산국장 과 해군성 수로부장의 공작에 의해서 대하원(貸下願)에 '리앙꼬島 영토편입'이 추가되어, 대한제국정부가 아니라 일본정부에 청원된 것이다.
더구나 당시 일본 내무성은 러일전쟁이 종결되기 전에 독도를 편입시키는 것은, '한국정부의 저항'으로 쉽지 않을 것이며, 열강에게 '일본이 한국병탄의 야심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할 위험이 있다고 영토편입을 반대하였다 .
즉, 당시 영토편입 당사자인 일본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독도의 영토편입은 국제법상으로 불법적인 것이었다.
둘째, 선점(先占)의 경우, 무주지역을 자국의 영역에 편입한다는 사실을 관계국에 정식통고 하고 대외적으로 공표하게 되어있는데, 일본은 그러한 절차를 편법으로 처리하였을 뿐 아니라, 편입사실을 일정기간 비밀에 붙였다. 일본은 영토편입이라는 중대한 사실을 중앙정부차원이 아닌 일개 현청의 조그마한 게시를 통해서 고시하였다. 이것은 대외적 공표라 볼 수 없으며, 대내적 공표로 보기에도 불충분하다.
편입 당시 일본의 관보(官報)를 비롯하여 국내에서 발행되는 신문 중, 영토편입이라는 중대사실을 보도한 신문이 하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독도를 죽도(竹島-다케시마)라고 표기한 신문조차 없었다. 또한 이해관계가 가장 밀접한 인근 관계국인 대한제국에 편입이후 1년이 지난 시점에, 정부대 정부차원이 아니라 오끼도사가 울도군수(鬱島郡守: 당시 행정구역)에게 구두로 전달하는 형태로 통고하였다.
대한제국은 즉시 강력히 항의 하였으나,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전으로 종결되어,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되는 등 제국의 일본식민지화가 굳혀져 가고 있던 당시에 이러한 항의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독도는 위와 같이 러일전쟁 중,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과정에서 불법 침탈되었으며, 독도의 침탈은 한반도 침탈의 시작이었다.

(9) 일제강점기의 수로지와 지도

(10) 해방과 독도의 회복
1945년 해방과 함께, 독도는 한반도 부속도서로서 우리에게 반환되었다.
2차대전이 종전된 후 연합국은 1945년 9월 27일 미 5함대 사령관의 '각서 80호'로 일본의 어로제한선을 설정하여 통지하였는데, 이를 '맥아더 라인'이라 한다. 이 선에 따르면 독도는 한국령에 귀속되어 있다.
1946년 1월 29일 일본정부에 하달된 연합군 최고사령관 훈령 677호(SCAPIN No 677) 3항에는 패전국 일본의 영역에서 제외되는 지역을 열거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제주도, 울릉도와 함께 독도(竹島)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1946년 6월 22일의 훈령 1033호에는 "일본의 선박과 선원은 독도의 12해리 이내에 접근해서는 안되며, 이 섬에 대한 여하한 접근도 금지한다"고 밝히고 있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은 전 세계가 인정한 셈이었다.

(11) 이승만 라인과 일본의 반발

(12) 독도의용수비대
한국전쟁 중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할 때 일본은 다시 독도에 불법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1953년에서 56년에 걸쳐 독도에서 일본의 불법 점령을 막아낸 것은 울릉도 출신 민간인들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었다.
의용수비대원들은 1953년 4월 독도에 입도한 후, 1956년 12월 25일 경북경찰청 울릉경찰서에 독도수비 임무와 장비 일체를 인계하고 각자 생업으로 돌아갈 때까지, 자금과 무기를 자체적으로 조달하면서, 약 3년 8개월간 수차에 걸쳐 계속된 일본의 영토침범을 격퇴하였다.
숭고한 애국심으로 갖은 고난과 역경을 견디면서 독도를 사수했던 의용수비대의 활약이 없었다면, 한국전쟁 중에 독도는 다시 일본에 점령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956년 12월 해산당시 독도의용수비대의 조직과 명단은 다음과 같다.
수비대장 홍순칠,부대장 황영문, 제1전대장 서기종, 대원 김재두·최부업·조상달·김용근· 하자진·김현수·이형우·김장호·양봉준, 제2전대장 정원도, 대원 김영복·김수봉·이상국·이규현·김경호·허신도·김영호, 후방지원대장 김병렬, 대원 정재덕·한상룡·박영희, 교육대장 유원식, 대원 오일환·고성달, 보급주임 김인갑, 보좌 구용복, 보급선장 정이권, 기관장 안학율, 갑판장 이필영·정현권

(13) 독도경비대
1956년 12월 25일 독도의용수비대가 완전히 철수하고, 1996년 6월 27일 경북경찰청 울릉경비대가 경비임무를 인수할 때까지 독도수비는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와 경북경찰청 318전경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독도경비대는 1956년 4월 8일 울릉경찰서에서 경비인무를 인수하기 시작할 당시 경사 1명 순경 9명에서, 1977년 1월 31일 경사 1명 전투경찰대원 9명으로 개편되었고, 이후 1996년 2월 13일까지 경찰 5·전투경찰대원 29명으로 꾸준히 증강되었다.
1996년 6월 27일 경북경찰청은 울릉도의 해안 경비를 맡아온 전경 318부대(226명)와 독도경비대(당시 38명)를 합쳐 울릉경비대를 신설하였다.
독도 경비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신설된 울릉경비대 산하에 독도경비대를 그대로 두고 울릉경비대를 경북경찰청의 직할부대로 운영하기로 하였다.
현재 동도에는 헬기장 및 첨단 경비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2개월 마다 울릉경비대 6개 소대 중 1개 소대씩 교체근무가 이루어지고 있다.

(14) 한일어업협정 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 Top

3. 독도를 나타낸 고지도들

■ 한국
(1) 해좌전도
lllllll93년 충남 부여에서 발견된 가로 72cm, 세로 115cm 크기의 지도, <해좌전도>는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lllllll추정되는데 독도를 '우산'으로 표기해 놓았으며 "울릉도는 본시 우산국으로 신라시대 이사부가 공격해 항 lllllll복을 받았다"고 기록이 있다.
(2) 동국지도
lllllll18세기에 정상익이 만든 <동국지도>에서는 울릉도와 우산도(독도)의 위치와 크기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lllllll있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가 하나라는 일본의 주장이 오류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3) 조선팔도 고금총람도
lllllll1674년(현종 14) 김수홍이 목각본으로 간행한 <조선팔도고금총람도>의 필사본. 울릉도의 윗부분에 우산 lllllll도라는 지명으로 독도를 기록하였다.

■ 미국
(1) 지리학회가 펴낸세계지도
lllllll지리와 지도분야의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지리학회 (내셔널지오그래픽소사이어티)는 지난 66년부 lllllll터 독도의 명칭을 '독도(Tok do)'로 바꿔 불러왔으며 일본 측 명칭인 다케시마는 아예 넣지도 않았음이 확 lllllll인됐다. 미국 지리학회의 발데스 부국장은 "지난 54년 한국의 내무부가 독도에 등대시설을 건설키로 하고 lllllll작업에 착수한 사실을 알고 이를 근거로 자료 조사를 한끝에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 말 lllllll했다.

■ 일본
(1) 삼국통람여지로정전도
lllllll1785년 일본의 경세 사상가이자 지리학자 하야시시헤이(林子平)가 그린지도로 독도가 당시 조선의 영토 lllllll라는 의미의 "朝鮮の 持え"라는 기록이 있다. 이 그림은 지난 93년 11월 4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견되어 lllllll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일본의 억지 주장에 쐐기를 박았다.
(2) 소학지리용신지도
lllllll한일합방 이전인 1904년부터 문부성이 발행, 사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국정교과서 소학지리용신지도에서 lllllll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표기해 놓고 있다. 우리나라를 한국이라고 표기하고 중국은 청국이라고 표기한 이 lllllll지도는 한국 지도 부분에서 강릉에서 가까운 북위 37.9°, 동경 129.5°지점에 죽도라는 이름으로 독도를 표 lllllll시하고 있다.
(3) 팔도총도
lllllll1592년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제작한 지도. 가로 36cm, 세로 495cm 의 lllllll크기인 이 지도에서 일본인들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일본 영토로 규정된 대 lllllll마도 역시 조선의 영토라고 기록하여 '대마도 논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영국
(1) 제임스콜네트의항해도
lllllll1791년 영국의 항해가 제임스 콜네트는 동해를 한국해로 표기하여 독도가 한국에 귀속된 섬으로 보았다.
(2) 제임스 와일드의 지도
lllllll영국 왕실 지도 제작자인 제임스 와일드가 1840년 만든 가로 83.3cm, 세로62.6cm의 지도로서 울릉도로 lllllll보이는 섬은 아고노트(Argonaut)로 독도로 보이는 섬은 다겔레트 (Dagelet)로 표시했고 한반도의 영토 lllllll안에 표시, 일본 영토와 구분해 놓았다.
(3) 동양삼국지도첩
lllllll1832년 독일의 동양학자 클라프로트가 가로 60cm, 세로 85cm의 크기로 제작 한 지도 <동양삼국지도 lllllll첩>에서는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면서 한국 영토로 소개하고 있다.

■ 러시아
(1) 조선동해안도
lllllll1854년 러시아 함대에 의해 작성된 지도로 한국해 안에 독도를 그려넣어 독도가 한국령임을 밝혔다.

■ 프랑스
(1) 인도 - 중국지도
lllllll프랑스의 지리학자 기욤 드릴이 1705년에 제작한 <인도 - 중국지도>에서는 동해를한국해로 표기해 놓고 lllllll있다.

■ 이탈리아
(1) 중국제국지도
lllllll1710년 이탈리아의 지리학자 슈포트가 제작한 <중국제국지도>에서도 동해가 한국해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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