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울릉도, 독도 상세지도 보기]

울릉도는 무릉, 우릉, 우산,으로 불렸던 섬이다.

1000년대 초 일본인들은 우루마로 불렀으며 1700년대 프랑스인들은 다쥐레(Dagulet)로 기록했다.

이두로 보아야 할 이 한자 표기들의 주류인 울릉과 우릉은 'ㄹ'이 하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그리고 우산은 우뫼로 읽힌다. 여기에 일본인들의 우루마 곧 울마를 고려하면 울릉과 우릉의 받침 소리는 'ㅇ' 이 아니라 'ㅁ'이었지 않나 싶다.

우뫼, 울마, 울름, 우름에 가장 가까운 소리는 우르뫼의 줄임말 울뫼다.
울릉도의 본래 이름은 이렇듯 산에서 온 것이다.(울뫼의 울은 나리분지를 울타리처럼 두른 산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울릉도의 높은산이라고는 성인봉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은 산 없는 봉이다. 본래 산이었던 것이 봉으로만 이름이 남은 것이다. 이 추론이 맞다면 개관에서 언급한 가설은 여기서 정설로 입증된다.

울릉도에서 발굴된 가장 오랜 유물은 김해식 토기 전통이 약간 남아 있는 조잡한 갈색 승문토기다.
석기나 고인돌은 물론 없다.
이로 볼 때 울릉도에 사람이 처음 들어간 것은 김해식 토기 시대 후기인 1세기쯤으로 추정된다.

울릉도로 추측되는 것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옥저조다.

   '고구려 동천왕 20년(246). 고구려에 쳐들어온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현도군의 태수 왕기로 하여금
   동천왕을 남옥저(지금의 함남 남부 지역)까지 쫓게 하였다.

거기까지 온 왕기가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사느냐고 묻자 그 지방 사람이 "언젠가 풍랑을 만나 동쪽의 한 섬에 도착한 적이 있었는데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칠월이면 소녀를 골라 바다에 빠뜨리는 풍습이있다고 들었다" 하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대해 일본인 역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 박사는 그섬은 틀림없이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 기록은 울릉도에 관한 가장 오랜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우산국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부터 보인다. 바로 거기에 신라 지증왕 13년(512) 하슬라(강릉) 주둔군 사령관 이사부가 뱃머리에 나무 사자를 세워 우산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고학자 김원룡 박사는 그 우산국 사람들이 낙동강 동쪽, 지금의 강원도와 경상도 바닷가 지방 출신들이라고 본다. 그랬기에 점령 당시 이사부의 나무 사자 거짓말이 통했다는 것이다(이사부가 거짓말을 할때 통역을 썼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기록의 문맥으로는 직접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400년 넘게 자취를 감춘 울릉도가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고려 통일 전야인 태조 13년(930)이다(그동안 울릉도는 정말 태평성대를 구가한 것으로 보인다). 백길, 토두라는 우릉도 사람 둘이 공물을 가지고 왕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90년쯤 뒤인 현종 9년(1018)에는 고려 조정에서 동북 여진 해적들의 노략질로 초토화된 우산국에 농기구를 보내 주고 13년에는 해적을 패해온 섬사람들을 지금의 경상도 영해 지방에 살 수 있도록 조처하고 있다.

현종 때는 여진 해적의 극성기였다. 1019년에는 그들이 50척이나 되는 배를 이끌고 일본의 규슈 지방까지 내려와 463명을 죽이고 1,230명을 잡아갔을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해적들이 포로가 되기도 했는데 그들은 대개 고려인으로서 여진 해적과 싸우다 잡혀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한다(일본 역사책에만 보이는 기록이다).

숙종 2년(1097) 안변도호부의 판관 안증은 원산 앞바다에서 열 척의 해적선과 맞붙어 40명을 죽이고 세 척을 나포했다. 숙종 12년(1107)과 그 이듬해에는 윤관이 동북 여진을 쫓고 거기에 9성을 쌓았다.
근거지를 뺏긴 여진족들은 1115년 하얼빈 부근의 회령 지방으로 옮겨 중원으로 쳐들어간다. 1125년에는 요나라를 멸망시키더니 이태 뒤에는 송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의 노른자 황하 유역을 차지한다. 동양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윤관의 일격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울릉도 사람들의 기록은 이보다 한참 전인 덕종 원년(1032)을 끝으로 끊기고 만다. 해적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현종 13년의 경우처럼 모두 육지로 나와 버렸던 것 같다. 이후 인종 19년(1141)과 의종 11년(1157)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해 사람이 살 수 있는가 보지만 조사로 그쳤을 뿐이었다.

울릉도에 다시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기 시작한 것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최중헌이 왕에게 시무 10조를 건의한 1200년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왜구라는 해적들이 몰려왔다. 그리하여 고종 10년(1223)부터 시작되어 조선 세종 원년(1419)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을 할 때까지 196년 동안 500여 회나 쳐들어왔던 그들 때문에 울릉도는 다시 무인지경으로 되돌아갔다.
그럼에도 들어가 사는 사람이 간혹 있었다. 산것, 갯것이 지천인데다 자유의 땅인 터라 버젓이 살 처지가 안 된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유토피아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조정에서는 군대를 보내 사람들을 잡아 육지로 끌고 들어오곤 했다. 사람이 있으면 왜구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선 태종 3년(1403)과 13, 14년, 세종 7년(1425)과 20,23년 무렵이었다. 이후 울릉도는 정말 빈 섬이 되었다.

이 지경에 이르자 일본인들은 저들 마음대로 들어와 나무를 베어가고 고기를 잡아갔다. 심지어는 제나라 땅이라며 다케시마라는 이름까지 붙여 놓았다. 그래서 동래 어부 안용복은 숙종 19년(1693)과 22년에 일본 막부로부터 독도는 조선땅임을 확인받아 이것이 양국 정부간의 공식 협약이 되게 했다. 그리고 고종 19년(1882) 조정에서는 마침내 공도정책(섬에 사는 것을 불법으로 치는 것)을 버리고 개척령을 발표하여 울릉도의 역사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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